대학 밖을 두려워하는 청년들
졸업은 본래 축하받는 일이다. 그런데 요즘 대학의 2월과 8월에는 다른 풍경이 함께 놓여 있다. 학점도 채웠고 졸업 요건도 모두 충족했음에도 굳이 학위를 받지 않겠다고 신청서를 내는 학생들이다. 학교는 이들을 학사학위취득유예생이라고 부른다. 받을 수 있는 졸업장을 받지 않겠다는 결정은 대체 왜 내리는 걸까?
졸업을 미루는 2만 명
숫자는 분명한 방향을 가리킨다. 2024년 고등교육기관의 학사학위취득유예생은 17,937명으로, 전년보다 2,655명, 17.4퍼센트가 늘었다. 역산하면 2023년은 1만 5천 명대였다. 그리고 2025년에는 전년 대비 15.8퍼센트가 증가한 20,769명을 기록했다. 3년 사이에 1만 5천 명이 2만 명을 넘어섰다. 한 해 전에도, 그 전 해에도 숫자는 꾸준히 올랐고, 4년제 대학 졸업에 실제로 걸리는 기간은 평균 5년을 넘긴 지 오래다.
이 숫자를 개인의 나태로 읽는 것은 쉬운 판단이지만 이유 전부를 말해주지는 않는다. 유예는 무료가 아니다. 학교에 따라 등록금을 내야 하고, 신청하면 번복할 수 없으며, 유예 기간에는 졸업증명서가 발급되지 않아 그사이 취업이 확정되어도 서류를 제출하지 못하는 일이 생긴다. 비용과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학적을 붙들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질문은 하나로 좁혀진다. 졸업 이후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길래 청년은 그 문턱을 넘으려고 하지 않는가?
무직이 되는 순간
답은 단순하다. 졸업하는 순간 직업란에 쓸 말이 사라진다. 어제까지 '학생'이던 사람이 오늘 '무직' 또는 '구직자'가 된다. 하는 일은 똑같다.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있고, 여전히 자기소개서를 쓰고 있다. 달라지는 것은 그 행위를 부르는 이름뿐이다.
이름이 바뀌는 일은 생각보다 크다. 학생은 아직 준비 중인 사람이고, 무직은 이미 실패한 사람처럼 들린다. 같은 하루를 보내면서도 전자는 유예된 상태고 후자는 판정된 상태다. 청년이 두려워하는 것은 실업이라는 조건 자체라기보다 자기 상태에 붙는 그 이름이다.
이 두려움이 개인의 예민함이 아니라는 사실은 노동시장 지표가 보여준다. 2026년 1월 15~29세 청년층의 '쉬었음' 인구는 46만 9천 명으로 5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고, 같은 달 청년 취업자는 전년 동월보다 17만 5천 명 줄었다. 2월에는 청년 고용률이 43.3퍼센트로 22개월 연속 하락했고, 쉬었음 청년은 48만 5천 명으로 여전히 40만 명 후반대를 유지했다. 이제 청년들은 '쉬었음 청년'이라는 행정 분류어를 자조의 언어로 되받아 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실패를 함의하는 사회에서 쉬었다는 단어 자체는 사회적 유용성에서 배제됨을 가리키는 폭력의 언어가 된다.
스스로 찍는 낙인
우려할 점은 청년 실업이 만성화된 사회에서 청년이 스스로 내적 낙인을 찍는 일이 점차 확산된다는 것이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스스로 모임에 나가지 않고, 안부 연락을 미루고, 명절에 본가를 피한다. 졸업 유예는 그 내면의 낙인을 한 학기씩 늦추는 장치다. 학생증이 남아 있는 한 아직 실패의 판정은 내려지지 않았다고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다.
문제는 구직이라는 활동의 성격이다. 구직에는 정해진 기한이 없다. 학기에는 종강이 있고 군복무에는 전역일이 있지만 구직에는 그런 것이 없다. 끝이 언제인지 모르는 활동은 시간이 지날수록 이력이 아니라 공백으로 기록된다. 그리고 공백은 다음 지원에서 소명해야 할 대상이 된다. 한 번의 탈락이 다음 도전의 조건을 나쁘게 만드는 구조다.
그래서 구직은 역설적인 일이 된다. 가능성을 찾기 위해 시작한 활동이 시간이 흐를수록 가능성을 차단하는 이력으로 바뀐다. 오래 준비할수록 불리해지는 경기라면, 그 경기에 들어가는 시점을 늦추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 된다. 졸업 유예는 나태의 증거가 아니라 이 구조에 대한 정확한 계산이다.
학생이라는 유동적인 신분
학생이라는 신분에는 두 가지 성질이 있다. 하나는 가시성이다. 학교 이름과 학번이 붙으니 설명이 필요 없다. 다른 하나는 유동성이다. 학생은 아직 정해지지 않은 사람이고, 따라서 바뀔 수 있는 사람이다. 전공을 더 듣고, 자격증을 따고, 방향을 틀어도 그것은 모두 탐색으로 읽힌다.
즉, 청년이 대학에 머물고 싶어하는 이유는 대학이 좋아서가 아니다. 학생이라는 신분이 이 사회에서 실패 가능성을 공식적으로 용인받는 거의 유일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학생이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과정이지만, 무직자가 시험에 떨어지는 것은 결과로 취급된다. 청년들은 실패할 권리를 사기 위해 한 학기치 등록금과 시간을 지불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진짜 물어야 할 것은 왜 청년이 졸업을 미루는가가 아니다. 왜 이 사회에는 학생 신분 말고 실패를 허용하는 자리가 없는가다.
실패를 연구하고 받아들이자
카이스트는 2021년 실패연구소를 세웠다. 실패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바꾸고 학생들에게 도전과 혁신을 장려하겠다는 것이 설립 취지였다. 이 연구소는 해마다 실패학회를 열어 학생들이 퇴짜맞고 불합격한 경험을 부스로 꾸며 공유하는 '망한 과제 자랑대회'를 진행하고, 반려와 불합격 인증 사진을 모아 전시로 만든다. 과학기술 인재를 길러내는 대학이 성공 사례가 아니라 거절당한 기록을 모아 전시한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이다. 실패는 숨길 것이 아니라 다룰 수 있는 자료라는 선언이다.
물론 한 대학의 연구소가 노동시장을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방향은 정확하다. 실패를 개인의 결격이 아니라 사회가 함께 다루는 자료로 취급하기 시작하면, 실패 이후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도 보이기 시작한다. 공백기를 소명 대상이 아니라 참여 이력으로 바꿔주는 프로그램, 폐업과 중단이 다음 심사에서 감점이 되지 않는 설계, 구직 기간에도 최소한의 생활이 무너지지 않게 받쳐주는 소득과 주거의 바닥. 이런 것들이 촘촘해질수록 졸업이라는 문턱은 낮아진다.
청년이 대학에 머물고 싶어하는 것은 대학 밖이 위험하기 때문이다. 밖이 안전해지면 청년은 스스로 나간다. 학생이라는 신분이 실패를 용인받는 유일한 자리가 아니게 될 때, 그때 비로소 청년은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의 가능성을 펼칠 수 있다. 졸업장을 미루는 2만 명이 우리에게 묻고 있는 것은 그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