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서울청년센터 강북(청년사례연구소)

영국 세입자는 이제 보증금을 돌려받고 집을 나간다 — 2007년 '보증금 보호법'이 바꾼 19년

장원경, 한명수
입력
해외 시리즈 ① 영국편. 한국보다 먼저 똑같은 문제를 겪고, 법으로 매듭지은 나라들의 이야기. 이번 편은 주거(살 집)에 초점을 맞춘다.
출처: Unsplash의 Vitaly Gariev

세라 씨는 2년 동안 살던 방 두 개짜리 플랫¹ 에서 이사를 나가는 날이다. 현관 초인종을 누른 사람은 집주인이 아니다. 넥타이를 맨 30대 남자가 클립보드와 태블릿을 들고 들어온다. 그는 인벤토리 클럭(Inventory Clerk)² 이다. 세라 씨와 집주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은 제3자다.

 

그는 방마다 돌면서 벽의 흠집, 카펫의 얼룩, 오븐 안쪽 기름때, 전구가 잘 켜지는지를 하나씩 체크한다. 2년 전 입주할 때 받아둔 체크인 보고서³ 와 지금 상태를 비교하고, 달라진 부분을 사진으로 남긴다. 세라 씨가 옆에서 "이 흠집은 원래 있었던 것 같은데요"라고 말하면, 인벤토리 클럭은 그 자리에서 2년 전 사진을 꺼내 바로 맞춰본다.

 

2시간 뒤 보고서가 이메일로 날아온다. 집주인이 청구한 금액은 £90(청소비 일부, 한화 약 16만 원)뿐이다. 세라 씨는 2주 뒤 나머지 £1,410(약 250만 원) 을 TDS⁴ 라는 기관 계좌에서 바로 입금받는다. 집주인의 손을 거치지 않고, 정부가 인정한 제3자 기관이 직접 보내준 돈이다.

 

이 장면은 불과 18년 전만 해도 영국에서조차 낯선 풍경이었다.


▸ ¹플랫(flat): 영국식 원룸·투룸 아파트. 한국의 빌라·오피스텔과 비슷하다. (영국은 '아파트'보다 '플랫'이 흔하다.)
▸ ²인벤토리 클럭: '방 안의 물건·상태를 기록하는 전문가'. 한국에는 아직 없는 직업인데, 영국에선 이사 때 집주인도 세입자도 아닌 중립적 제3자가 방 상태를 체크해 기록으로 남긴다.
▸ ³체크인 보고서: 입주 첫날 집의 상태(흠집, 얼룩, 가전 작동 여부)를 사진과 함께 문서로 정리한 것. 나중에 나갈 때 '체크아웃 보고서'와 맞춰본다.
▸ ⁴TDS (Tenancy Deposit Scheme)**: 영국 정부가 승인한 보증금 보관 기관. 집주인이 보증금을 자기 통장에 넣어두는 게 아니라, TDS 같은 기관에 맡겨두었다가 이사 때 이 기관이 직접 반환한다.

 


 

그 전엔 어땠을까?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영국 세입자들의 가장 흔한 불만은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했다" 였다. 집주인이 청소비·수리비 명목으로 임의로 공제해버리고, 세입자는 법원까지 가지 않으면 되찾을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영국 보증금 제도를 다룬 위키피디아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이 보호 제도가 도입되기 전에는, 집주인이 보증금의 일부 또는 전부를 돌려주지 않아도 세입자가 되찾기 어려웠다."

(원문: "before introduction of these schemes, if a landlord kept all or part of your deposit, it could be difficult to get it back.")

 

그 시기 영국의 민간 임대 시장은 빠르게 커지고 있었다. 집값이 올라 자기 집을 사는 사람 비율은 줄고, 젊은 세대가 임대로 몰리면서 분쟁 숫자도 같이 늘어났다. 개인 한 명 한 명이 소송으로 해결하기엔 한계가 명확한, 구조적인 문제였던 셈이다.

 


 

법이 먼저 나왔다 — Housing Act 2004

 

영국 의회의 답은 단순했다. '분쟁 자체가 생기지 않도록, 돈을 집주인 손에서 떼어 놓자.' 2004년에 만든 Housing Act 2004(2004년 주택법) 에 "모든 집주인은 세입자에게 받은 보증금을 정부가 승인한 기관에 맡겨야 한다"는 의무를 처음으로 법으로 못 박았다.

 

3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07년 4월 6일부터 잉글랜드·웨일스 지역의 모든 새 AST 계약¹ 에 이 의무가 전면 적용됐다.

제도는 세 갈래로 갈라졌다. 정부가 직접 운영하는 대신, 민간에 승인권을 주고 3개의 공식 보증금 보호 기관(TDP 스킴²) 을 지정했다.

 

임대인이 받은 보증금이 30일 안에 어느 기관, 어떤 방식으로 맡겨지는지 — 영국 보증금 보호 제도의 전체 구조.
해당 이미지는 AI로 생성되었습니다.

 

보관 방식은 두 가지다. 보관형 은 기관이 돈을 직접 맡아두는 방식이라 집주인은 손대지 못하고, 보험형 은 집주인이 계좌에 두되 보험에 가입해 '떼어먹으면 보험사가 대신 돌려준다'는 구조다. 왜 굳이 두 가지를 다 허용했을까? 영국 의회 보고서의 설명은 이렇다. "임대 사업자의 자금 운용을 막지 않으면서도 세입자 보호는 확보하기 위해서." 큰 임대 회사들이 당장 보증금을 전부 외부에 맡기는 건 현금 흐름상 부담이니까 보험 가입으로도 의무를 다할 수 있게 열어둔 것이다.

 

이후 법은 세 번 더 보강됐다. 2011년엔 의무 위반 시 벌칙이 강해졌고, 2019년 Tenant Fees Act(세입자 수수료법) 로는 보증금 상한이 "주 5주치³" 로 제한됐다. 청소비를 자동으로 떼가는 관행도 이때 금지됐다.


▸ ¹AST 계약 (Assured Shorthold Tenancy): 영국의 표준 민간 임대 계약 형태. 한국으로 치면 '전·월세 표준계약서' 비슷한 위치로, 영국 임대차의 기본 계약 유형이다.
▸ ²TDP 스킴 (Tenancy Deposit Protection Scheme): 보증금 보호 제도. 정부가 "이 3곳 중 한 곳에 맡겨야 한다"고 지정한 공식 기관. TDS, My Deposits, DPS — 이렇게 세 군데다.
▸ ³주 5주치 상한: 월세 임대차에서 보증금을 '주당 월세의 5배' 이하로 제한. 예컨대 한 주에 £200짜리 방이면 보증금은 최대 £1,000. 한국과 달리 영국은 월 단위가 아닌 '주 단위'로 월세를 계산하는 관습이 있다.

 


 

제3자가 기록해야 법정에서 통한다

 

법이 자리를 잡으면서 함께 커진 산업이 있다. 앞에서 세라 씨 방에 왔던 인벤토리 클럭들이다.

영국에는 AIIC(독립 인벤토리 클럭 협회)¹ 라는 단체가 1996년에 만들어져 업계 표준을 세웠다. 협회는 자기 역할을 이렇게 소개한다.

 

"1996년 설립 이래 우리 협회는 '전문적이고 독립적인 인벤토리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리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인벤토리 클럭이 만드는 보고서는 집주인도 세입자도 아닌 제3자가 사진과 함께 남긴 기록이다. 그래서 분쟁이 생겼을 때 법정에서도, TDS 같은 보증금 기관의 중재위원회²에서도 1차 증거로 인정된다. 영국 부동산 매체들은 이 점을 반복해 강조한다.

 

"전문 인벤토리 클럭은 꼼꼼하고 편파적이지 않은 점검을 보장하기 때문에 분쟁 자체가 일어날 확률을 줄여준다."

 

덕분에 "기록이 없어서 말싸움만 하는" 상황 자체가 크게 줄었다. 기록이 있으면 세입자는 부당한 공제에 맞설 수 있고, 집주인도 실제 손상에 대해 정당하게 공제받을 수 있다. 제3자가 남긴 기록이 법적 효력을 인정받자, 분쟁의 무게 중심은 "사실 확인"에서 "기준 해석"으로 옮겨갔다. "이게 원래 있던 흠집인지 아닌지"가 아니라, "이 정도 마모는 세월에 따른 자연 손상인지 아닌지"로 논의가 올라간 것이다.


▸ ¹AIIC (Association of Independent Inventory Clerks): 영국의 독립 인벤토리 클럭들이 만든 협회. '전문 자격'과 '중립성' 기준을 만들어 업계 신뢰도를 끌어올렸다.
▸ ²중재위원회 (Adjudication): 보증금 관련 분쟁을 법원 밖에서 해결하는 기관 내부 절차. 법원처럼 변호사를 세우지 않아도 되고, 서면 심리만으로 진행된다.

 


 

분쟁이 생겼을 때, 영국은 어떻게 풀까

 

체크아웃에서 공제 이견이 생겼을 때 — 영국 보증금 분쟁 해결의 5단계와 세 갈래 결과.
해당 이미지는 AI로 생성되었습니다.

 

법원도 없고, 인지대(소송할 때 내는 수수료)도 없다. 양쪽이 서면과 사진만 올리면 끝이다. 판정은 보통 28일 안에 나오고, 돈은 기관이 자기 계좌에서 바로 쏴준다. 집주인이 불복한다고 안 주는 상황 자체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

 


 

19년 뒤, 영국의 현재

 

2025년 기준 영국 주요 기관의 통계를 모아 보면 그림이 이렇다.

   • 약 470만 건의 보증금 이 세 기관에 맡겨져 있다.
   • 한 해에 분쟁 신청은 약 3만 건, 전체 보증금의 0.7% 수준이다.
   • 가장 큰 TDS 한 곳만 해도 145만 건을 보관하고 있고, 연간 약 1만 6천 건의 분쟁을 판정한다.
   • 판정 결과를 보면: 세입자 완전 승소 22.84% / 집주인 완전 승소 19.22% / 일부씩 나누어 가진 판정 약 58%. 어느 한쪽 손을 완전히 들어주기보다 "절반씩 책임"이 가장 많다.
   • 분쟁 사유 1위는 압도적으로 청소 문제(전체의 50% 이상), 그 다음이 손상·원상복구다.

 

눈에 띄는 건 분쟁률이 전체의 1%도 안 된다는 점이다. 이는 두 가지 뜻이다. 하나, 대부분의 보증금은 큰 갈등 없이 반환된다. 둘, 분쟁이 나도 법원이 아니라 기관 내부 중재로 해결된다. 법원 소송이 드는 시간과 돈이 크게 줄어든 셈이다.

 


 

한국은?

 

한국은 아직 보증금 보호 의무, 제3자 기록 의무, 분쟁 해결 기관이 영국처럼 하나로 엮여 있지 않다. 임대차분쟁조정위원회가 있긴 하지만 임의 참여(집주인이 응하지 않아도 강제하기 어려움) 라 한계가 있고, 제3자 인벤토리 산업도 아직 자리를 잡는 중이다. 그래서 영국이 19년 전 출발한 지점에 한국은 이제 막 도달하고 있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다음 편에서는 호주가 같은 문제를 어떻게 다르게 풀었는지 살펴본다. 영국이 "전국 단일 법 + 민간 3개 기관"으로 갔다면, 호주는 "주(州)별로 정부가 직접 보증금을 맡는 방식"을 택했다. 같은 목표를 향해 전혀 다른 설계로 간 두 나라를 나란히 보면, '우리한테 맞는 건 어느 쪽일까'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 출처

1. [Tenancy deposit scheme (England and Wales) — Wikipedia](https://en.wikipedia.org/wiki/Tenancy_deposit_scheme_(England_and_Wales))
2. [Tenancy deposit schemes — House of Commons Library Research Briefing SN02121](https://commonslibrary.parliament.uk/research-briefings/sn02121/)
3. [Association of Independent Inventory Clerks (AIIC) — The Inventory Process](https://theaiic.co.uk/about-us/the-inventory-process/)
4. [TDS Group — Statistical Briefing](https://www.tdsgroup.uk/statistical-briefing)
5. [Tenancy Deposit Scheme — Statistical Briefing from TDS Group](https://www.tenancydepositscheme.com/statistical-briefing-from-tds-group/)
6. [NRLA — What 2025 taught us about deposit disputes](https://www.nrla.org.uk/news/what-2025-taught-us-about-deposit-disputes)
7. [Shelter England — How to check and agree an inventory](https://england.shelter.org.uk/housing_advice/private_renting/how_to_check_and_agree_an_inventory)
8. [NRLA — Complete guide to inventory for landlords](https://www.nrla.org.uk/news/complete-guide-to-inventory-for-landlords)
9. [mydeposits — Inventories, the complete guide](https://www.mydeposits.co.uk/content-hub/inventories-the-complete-gu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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