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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르무즈 봉쇄·전쟁도 ‘불가항력’ 안 된다… 법원이 요구하는 것은 "이행 불능"

이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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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법상 ‘비용 상승’은 불가항력 불인정 추세… CISG 제79조·ICC 조항 실무 적용 관건

  중동의 지정학적 위기가 고조되며 호르무즈 해협 봉쇄 가능성이 거론되자, 국내 수출입 업계가 포스 마주르(Force Majeure, 불가항력) 카드 검토에 착수했다. 전쟁이나 봉쇄 등 통제 불능의 사태가 발생했으니 계약 위반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계산이다. 그러나 법조계의 시각은 냉정하다. 국제 중재 판례와 국내법상 전쟁이 곧바로 법적 면죄부로 이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다.

 

  본지는 호르무즈 봉쇄 상황을 가정해 불가항력주장의 법적 한계와 기업의 대응 방안을 분석했다.

 

[선박 항로 추적 사이트 ‘마린트래픽’으로 본 호르무즈해협 주변 선박 현황.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피할 수 있는 UAE 동부 항구쪽에 유조선 등이 몰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선박 항로 추적 사이트 ‘마린트래픽’으로 본 호르무즈해협 주변 선박 현황. 호르무즈 해협 통과를 피할 수 있는 UAE 동부 항구쪽에 유조선 등이 몰려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CISG 79·영미법 Frustration 불능의 기준은 엄격하다

 

  국제 거래의 기본서 격인 영미법과 CISG(국제물품매매계약에 관한 유엔 협약) 하에서 불가항력이 인정되려면, 해당 사건이 ▲예측 불가능해야 하며 ▲당사자의 통제 범위를 벗어나야 하고 ▲무엇보다 이행이 객관적으로 불능이어야 한다. 이는 CISG 79조가 명시한 면책 요건으로, 단순한 수익성 악화나 비용 상승만으로는 충족되지 않는다.

 

  영미법상으로는 계약목적 달성 불능(Frustration)’ 법리가 적용된다. 이는 계약 체결 후 당사자가 예상치 못한 사정 변화로 인해 계약의 목적 자체를 달성할 수 없게 된 경우에만 계약상 의무를 면하는 법리로, 적용 범위가 매우 좁다.

 

  과거 수에즈 운하 폐쇄 당시 영국 법원은 이른바 유제니아(The Eugenia) 판결을 통해 중요한 원칙을 세웠다. 운하가 막혀 희망봉으로 우회하느라 운송 기간이 길어지고 비용이 폭등했더라도, 그것이 계약의 근간을 흔들 정도가 아니라면 Frustration이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시한 것이다

 

  이 판결은 오늘날 호르무즈 봉쇄 상황에도 직접 적용되는 선례로 인용된다.

 

  국제거래·통상사건을 현장에서 접하고 있는 변호사(법무법인 여암 이희준 변호사)"호르무즈 해협이 막혀도 육상 파이프라인이나 우회 항로가 존재한다면, 법원은 이를 이행 불능이 아닌 단순한 수익성 악화로 간주한다""수출 기업이 비용 부담을 이유로 계약을 파기할 경우 오히려 역공을 당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 국내법 사정변경— 경제적 변동은 기업의 몫

 

  우리 민법은 사정변경 원칙에 관한 명문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대법원은 민법 제2(신의성실의 원칙)에서 사정변경 법리를 도출하며, 계약 성립의 기초가 된 객관적 사정이 현저히 변해 계약 준수가 신의칙상 현저히 부당한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해제를 인정한다(대법원 200774356 판결 등 참조).

 

  그러나 법원은 유가 급등, 원자재 가격 상승, 환율 변동 등 경제적 사정의 변화는 대부분 기업이 감수해야 할 경영 리스크로 본다. 호르무즈 사태로 물류비가 2~3배 폭등하더라도, 계약 이행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지 않는 한 한국 법정에서 승소할 확률은 매우 낮다는 것이 중론이다.

 

  ▶ 판례로 본 불가항력 인정 요건의 엄격성

 

  실제로 국내 판례에서도 계약서상 불가항력 조항에 천재지변, 전쟁, 폭동, 내란, 법령의 개폐 및 제정, 공권력에 의한 명령처분 등이 열거되어 있는 경우, 그 외의 사유는 불가항력으로 인정받기 어렵다고 판단한 사례가 있다.

 

【광주지방법원 순천지원 2018. 12. 11. 선고 2018가단73659 판결 손해배상()】 불가항력 조항에 열거된 사유 외 사정은 불가항력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시.

 

  나아가 전력판매대금이 하락하여 계약을 그대로 유지할 경우 정상적인 운영이 어렵다는 사정은 계약서상 천재지변, 전쟁, 소요사태, 폭동 등 불가항력 사항으로 정상운영이 어려운 경우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판결도 있다. 원자재 가격 급등으로 인한 수익성 악화 역시 같은 논리가 적용된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17. 8. 22. 선고 2017가합507057 판결 계약해지확인】 경제적 사정 변화에 의한 수익성 악화는 불가항력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명확히 판시.

 

 

ICC 불가항력 조항 2020 — 실무의 기준점

 

  국제상업회의소(ICC)2020년 개정한 ‘ICC Force Majeure Clause 2020’을 표준 불가항력 조항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 조항은 전쟁, 테러, 자연재해 외에 정부 조치·수출입 금지·항만 봉쇄 등을 불가항력 사유로 열거하며, 영향받은 당사자가 신속히 통지하고 대안 이행 방법을 모색할 의무를 부과한다.

 

  실무 전문가들은 계약서 작성 단계에서 ICC 표준 조항을 채택하거나, 이를 참고해 구체적 사유를 열거하는 방식을 권고한다. 단순히 전쟁 등 불가항력 시 면책된다는 포괄 조항은 분쟁 상황에서 실효성이 낮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하여 CISG 6조는 당사자가 CISG 79조의 적용을 배제하고 불가항력 사유 및 그 효과에 대해 협약과 달리 규정할 수 있음을 명시하므로, 계약서 작성 단계에서의 대비가 더욱 중요하다.

 

 

전쟁 조항의 디테일이 승패 가른다

 

  결국 분쟁의 향방은 계약서 내 불가항력 조항이 얼마나 구체적인가에 달려 있다. 법조계는 다음 두 가지를 핵심으로 꼽는다.

 

 

구체적 명시전쟁이라는 포괄적 단어 대신 호르무즈 해협의 군사적 봉쇄중동 지역 내 교전으로 인한 항만 폐쇄등을 특정해야 한다.
경제적 한계선비용이 기존 대비 ○○% 이상 상승할 경우를 불가항력 사유에 포함하거나, 가격을 재협상한다는 에스컬레이션(Escalation)’ 조항을 두는 것이 실질적인 방어막이 된다.

 

 

  전쟁 뿐 아니라 코로나19 확산에 따른 공항과 항구 폐쇄, 개성공단의 폐쇄 등의 사안에서도 이와 유사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 코로나19 봉쇄조치·개성공단 사례가 주는 시사점

 

  계약서에 입출항금지·정부 규제 등이 구체적으로 열거된 경우, 그에 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하면 불가항력이 인정될 수 있다는 판례가 축적되고 있다. 코로나19로 인한 말레이시아·베트남의 출입국 봉쇄조치가 계약상 불가항력에 해당하는지가 문제된 사안에서, 법원은 계약서상 불가항력 조항에 "입출항금지, 법률 또는 정부기관의 규제 또는 공적의 행위와 같은 당사자의 합리적인 통제를 벗어나고, 과실과 태만이 없는 불가항력으로 인하여 계약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행할 수 없는 경우"가 포함되어 있고, 불가항력 발생 후 15일 이내 서면 통지함으로써 면책효과가 발생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는 호르무즈 봉쇄로 인한 원자재 수급 차질에도 유사하게 적용될 수 있는 논리다.

 

【창원지방법원 진주지원 2024. 5. 14. 선고 2022가합10692 판결 채무부존재확인】 계약서에 입출항금지·정부기관 규제 등이 열거되어 있고 서면 통지 요건을 갖춘 경우 불가항력으로 인한 면책 인정.

 

  한편, 개성공단 폐쇄로 인해 물품 공급이 불가능해진 사안에서도, 법원은 계약서상 천재지변, 기타 불가항력으로 인한 사유에 해당할 수 있다고 보아 지체배상금 책임을 면제한 바 있다. 정부의 공권력 행사로 이행 자체가 물리적으로 불가능해진 경우에는 불가항력이 인정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로, 호르무즈 봉쇄로 인한 수출입 금지 조치가 내려지는 경우에도 유사한 논리가 적용될 수 있다.

 

【수원지방법원 성남지원 2015. 5. 29. 선고 2014가합207005 판결 물품대금】 개성공단 폐쇄로 인한 이행 불능 — 공권력 행사로 물리적 이행이 불가능해진 경우 불가항력 인정, 지체배상금 책임 면제.

 

  반면, 법원은 불가항력 면책사유를 예시적으로 볼 경우 계약의 구속력이 지나치게 약화될 우려가 있다며, 계약서에 면책사유가 열거된 경우 이를 한정적으로 해석하는 입장도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호르무즈 봉쇄가 계약서에 열거된 사유에 해당하는지를 엄격하게 검토해야 한다.

 

【서울중앙지방법원 2023. 11. 21. 선고 2022가단5344609 판결 출연료및위약금】 불가항력 면책사유는 예시적이 아닌 한정적 열거로 해석함이 타당하다고 판시.

 

▶ 책임준공확약 등 특수 계약 — 계약서 문언의 무게

 

  계약서의 문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는 또 있다. 책임준공확약서에서 "천재지변, 내란, 전쟁 등 불가항력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어떠한 사유가 발생한 경우에도 준공예정일까지 준공하겠다"는 내용이 있는 경우, 법원은 이를 천재지변·전쟁·내란과 같이 통상적으로 공사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위험요소로 고려하기 어려운 극히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귀책사유가 없더라도 책임을 부담하도록 약정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수출입 계약에서도 불가항력 조항이 어떻게 쓰여 있느냐가 분쟁의 결론을 사실상 결정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교훈이 적용된다.

 

【대구지방법원 김천지원 2024. 11. 22. 선고 2024가합31242 판결 손해배상()】 책임준공확약 조항에서 열거된 불가항력 사유를 엄격 해석 — 귀책사유 없는 경우에도 준공 책임 인정.

 

 

CISG 79조 제4항 — 준비된 통지는 법적 의무

 

  법무법인 여암의 파트너 변호사인 이희준 변호사는 기업들에 준비된 통지이행 노력의 입증을 강조했다. 이는 단순한 실무 권고가 아니다. CISG 79조 제4항은 불가항력으로 이행이 방해받은 당사자가 합리적인 기간 내에 상대방에게 그 장애 및 효과를 통지해야 한다고 명시하며, 통지를 게을리한 경우 추가 손해배상 책임을 부과한다.

 

  이 변호사는 "사태 발생 즉시 상대방에게 상황을 서면 통지하는 것은 기본"이라며 "선박을 수배하려 노력했던 기록, 보험사로부터 위험 지역 진입 거부를 통보받은 공문 등을 데이터로 축적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할 수 없어서 안 하는 것할 수 있는데 안 하는 것의 차이를 증거로 보여줘야 한다는 취지다.

 

 중동발 공급망 쇼크가 현실화되는 지금, 기업들은 막연한 낙관론을 버리고 계약서 속 ‘글자’ 한 자 한 자를 다시 점검해야 할 시점이다.

이용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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