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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청소년, 보호의 대상 넘어 회복의 주체로 바라볼 때
COLUMN
[이우원]위기청소년, 다시 서는 길

위기청소년, 보호의 대상 넘어 회복의 주체로 바라볼 때

이우원 칼럼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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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청소년의 현실과 한계
위기청소년의 현실과 한계
위기청소년의 현실과 기존 접근의 한계

 올해 국내 청소년 인구(924)는 약 791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15.3%에 달한다​. 이 중에는 가정 해체, 학대 피해, 가출, 학교 중단, 인터넷 중독, 비행 등 다양한 어려움에 처한 이른바 위기청소년이 존재한다. 위기청소년은 학업 중단이나 범죄 관여로 표면화되기도 하지만, 그 배경에는 빈곤, 가정 폭력, 정신건강 문제, 디지털 중독 등 복합적 요인이 깔려 있다. 실제로 지난해 하반기(2023612) 청소년상담복지센터에 도움을 요청한 위기청소년들이 호소한 주요 문제는 과의존·중독(38.8%), 대인관계 갈등(22.4%), 정신건강 문제(18.6%) 순이었다​. 위기청소년은 초등학생 시기부터 발생하여 중학생(33.1%), 고등학생(22.6%)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분포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위기청소년은 우리 사회 곳곳에 존재하며, 그 어려움의 양상도 다층적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위기청소년을 대하는 시선과 대응은 여전히 단편적이다. 흔히 가출청소년이라 불리는 가정 밖 청소년의 경우, 언론 보도에서 비행과 소년범죄로 묘사되어 왔다. 이러한 부정적 낙인은 이들이 가정 밖으로 내몰린 배경을 외면한 채 문제 행위만 부각하는 편견에서 비롯된다​. 실제 한 조사에서도 가정 밖으로 내몰린 청소년에 대한 부정적 시선과 부족한 이해는 이들의 소년범죄 노출을 증가시킬 뿐 아니라 안정적인 자립을 방해한다고 지적한다​. 보호자가 없는 청소년을 잠재적 범죄자로만 여기고 격리하거나 처벌하는 경향은, 정작 그들이 왜 거리로 나왔는지에 대한 구조적 원인을 간과한다.

 

정부 정책 또한 위기청소년을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한정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간 위기청소년 정책은 일시 보호시설(일시쉼터, 단기·중기쉼터), 선도나 교정을 위한 소년원·소년법정, 최소한의 생계비를 지원하는 특별지원 등에 초점이 맞춰져 왔다. 이러한 시설 중심·처벌 교정 중심·일시지원 중심 접근은 위기청소년을 당장의 위험에서 격리하거나 응급 처치하는 역할은 했지만, 근본적인 회복과 자립으로 이끄는 데는 한계를 드러냈다. 예를 들어 현행 청소년쉼터는 입소 기간에 따라 24시간 일시 보호(최대 3개월)에서 중·장기 보호(최대 2)로 유형화되어 있는데, 한정된 기간 이후 청소년이 다시 안정적으로 살아갈 지속 방안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있다​. 또한 쉼터 입소나 교정시설 경험이 오히려 낙인효과로 이어져 이후 학교 복귀나 취업에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한편, 위기청소년을 바라보는 사회 구조적 모순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가정에 문제가 있어도 대안 가정이나 양육 체계가 마땅치 않고, 학교 밖으로 나오면 학습·진로 지원이 끊기는 현실, 복지와 보호 체계가 부처별로 나뉘어 산발적으로 지원되는 구조 등이 그것이다. 예컨대 학업을 중단한 청소년은 교육부의 위탁교육과 여성가족부 산하 학교밖청소년지원센터(꿈드림), 지방자치단체의 복지서비스 등 여러 창구를 찾아다녀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정보에 접근하지 못하거나 행정 절차를 밟지 못해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이는 청소년이 많다. 위기청소년 특별지원 제도가 있지만 일정 소득 이하 등 선별요건을 충족해야 하고 일회성 지원에 그치는 경우가 태반이다. 결국 기존 패러다임 아래에서는 위기청소년을 온전히 감싸지 못하고, 오히려 반복적인 위기와 사회적 비용으로 돌아오는 악순환이 계속되어 왔다.

 

이제는 새로운 접근과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고 있다. 위기청소년을 더 이상 단순 보호나 격리의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문제 해결의 능동적 주체이자 미래 사회의 구성원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인식 전환이다. 이를 위해 정부 정책부터 현장 복지, 지역사회, 시민의식까지 접근 방식의 재설계가 요구된다. 이하에서는 최근 국내에서 모색되는 새로운 정책 모델들과 해외 선진사례들을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위기청소년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언하고자 한다.

 

국내의 새로운 시도: 통합지원체계 개편부터 청소년 참여까지

 우리나라에서도 위기청소년 지원을 혁신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 모델이 최근 제시되고 있다. 여성가족부는 제19차 청소년정책위원회를 통해 「제7차 청소년정책 기본계획(2023~2027)」을 확정하였는데, 여기에는 플랫폼 기반 청소년활동 활성화, 데이터 활용 청소년 지원망 구축, 청소년 유해환경 차단 및 보호 확대, 청소년의 참여·권리 보장 강화 등 청소년 정책의 새로운 방향이 담겼다​. 특히 디지털 시대에 맞춰 온라인 플랫폼을 통한 상담·멘토링과 빅데이터를 활용한 위기징후 탐지 및 맞춤 지원체계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 눈에 띈다. 예를 들어 인터넷과 스마트폰 활용도가 높은 청소년들에게 SNS 기반으로 접근하여 고민을 실시간 파악하고 연계 서비스를 제때 제공하는 디지털 멘토링 사업이 논의되고 있다. 이는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워하는 위기청소년이 언제 어디서든 24시간 상담받을 수 있도록 돕는 장치를 마련하겠다는 취지다. 이미 청소년 상담전화 138836524시간 긴급 상담과 구조 지원을 제공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채팅상담·온라인 멘토 매칭 등 디지털 접점도 확대될 예정이다.

 

기존 분절적 지원체계를 통합적 안전망으로 개편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하다. 과거 지역사회청소년통합지원체계(CYS-Net)로 불리던 위기청소년 지원망은 최근 청소년안전망이라는 이름으로 재정비되었다. 정부는 2019년부터 시범적으로 지자체에 전담 조직인 청소년안전망팀을 설치하여 지역 내 경찰서, 학교, 복지기관, 병원 등과 협력하는 모델을 도입했고, 위기청소년 사례를 통합 관리하는 정보시스템 구축도 추진했다​. 다만 이러한 통합지원체계 개편은 아직 전국적 확대가 미흡하여, 2021년 기준 단 15개 시··구만 청소년안전망팀을 운영 중인 실정이다​. 중앙정부 차원의 정책 의지는 확인되나, 지방자치단체의 역할과 책임이 제도화되지 않아 현장 실행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나온다. 이에 대한 보완으로 정부는 지역사회 중심 위기 아동·청소년 통합보호체계구축을 국정과제로 언급하며 부처 칸막이를 넘어선 협업을 모색하고 있다​.

 

청소년 참여형 정책설계 역시 새로운 패러다임의 한 축이다. 서울시 등 일부 지자체에서는 청소년 당사자가 정책 과정에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청소년 참여위원회, 청소년 정책 토론회를 활성화하고 있다. 청소년 문제를 청소년이 가장 잘 알고 해결 아이디어도 낼 수 있다는 철학 아래, 위기청소년 출신 청년이 정책자문에 참여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이는 청소년을 정책의 객체가 아닌 주체로 인정하는 상징적 변화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청소년정책위원회에 민간전문가 뿐 아니라 청소년 위원을 포함시키고, 각 시··구에 청소년참여위원회 설치를 권고하고 있다. 핀란드의 청소년 참여제도를 벤치마킹한 이러한 조치는, 정책 결정 단계에서부터 민관 협치 거버넌스를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평가된다. 실제 핀란드에서는 법으로 모든 지방자치단체에 청소년의회를 두도록 해 청소년들이 지역 정책에 의견을 낼 권리를 보장하고 있으며​, 우리도 장기적으로 이같은 제도화를 검토 중이다.

 

또 다른 국내의 새로운 접근은 지역사회 기반 자립 지원의 강화다. 위기청소년을 보호시설에 머무르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사회 안에서 교육과 직업훈련, 멘토링을 제공하여 자립을 돕는 모델이 대두되고 있다. 예컨대 민간단체와 지방정부의 협력으로 운영되는 일하는학교 프로그램은 학교 밖 위기청소년에게 대안교육과 인턴십 기회를 주어 사회진출을 지원한다.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이 프로그램에 참여한 위기청소년 208명 중 135(64.9%)이 첫 취업에 성공하거나 3개월 이상 직장에 적응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이러한 성공 사례는 일방적 보호보다 능동적 역량 강화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여준다. 정부도 2023년부터 위기청소년 자립지원강화사업을 통해 쉼터 퇴소 청소년에게 자립준비금, 직업훈련 연계, 멘토 지원 등을 확대하고 있다. 나아가 교육부·여가부 등 관계부처 합동으로 청소년 자립지원 패키지를 마련, 위기청소년이 성인이 되기 전까지 학업-직업-주거를 단계적으로 이어갈 수 있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요약하면, 국내에서는 통합(integrated support), 예방(early detection via data), 디지털 활용(온라인 멘토링·상담), 협치(청소년·민간 참여), 자립 지원(직업·주거 연계) 등이 새로운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이는 모두 위기청소년 문제를 기존과 다른 각도에서 풀어보려는 노력들이다. 물론 이러한 시도가 실제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려면 법제 정비, 예산 확보, 관련 기관들의 협력 등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는 안 된다는 반성과 함께 청소년을 위해 패러다임을 바꾸자는 방향성은 분명해졌다.

 

해외 혁신 사례: 트라우마 인식, 회복적 정의, 24시간 서비스

 세계 각국도 청소년 위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새로운 접근법들을 도입해왔다. 특히 미국, 유럽, 일본 등에서는 우리보다 앞서 트라우마 인식 시스템, 회복적 정의 프로그램, 청소년 참여 정책, 24시간 통합서비스 모델 등을 실행하며 성과를 거두고 있다. 몇 가지 대표 사례를 살펴보자.

 

미국 – 트라우마 인식 기반 시스템

 미국의 많은 주()에서는 소년사법과 복지 체계에 Trauma-Informed Care(TIC), 즉 트라우마 인식 기반 접근을 도입하고 있다. 이는 청소년 비행이나 일탈행동 뒤에 숨은 심리적 트라우마를 이해하고 치유하는 데 초점을 맞춘 접근이다. 연구에 따르면 소년사법 시스템에 연루된 청소년 다수가 어린 시절 학대, 가정폭력, 범죄 노출 등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은 경험이 있으며, 교정시설 내에서조차 폭력에 지속 노출되는 실정이다​. 미국의 소년원과 보호관찰 기관들은 이러한 현실을 반영해 전 직원 트라우마 교육, 입소자 트라우마 평가 의무화, 치유 중심의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일례로 텍사스주는 시설 내 처우를 전면 개편해 텍사스 모델이라는 청소년 치유 프로그램을 도입했으며, 콜로라도주는 Project JUSTIS라는 트라우마 인식 시스템 프로젝트를 시행했다​. 전문가들은 소년사법 전 과정에 걸쳐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시스템 전체가 트라우마에 기반해 재구성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러한 노력의 효과로, 트라우마 치료를 병행한 청소년의 재범률 감소와 정서 안정 향상이 보고되고 있다.

 

영국 등 – 회복적 정의(Restorative Justice)

회복적 정의는 범죄나 갈등으로 깨진 관계를 회복하고 가해 청소년의 책임 인정과 피해자 치유에 중점을 둔 접근법이다. 영국은 일찍이 소년사법에 회복적 정의를 도입해 청소년 범죄 심리재판소(Youth Court)와 청소년 책임 패널(Referral Order Panel)에서 가해 청소년, 피해자, 지역사회 대표가 함께 문제 해결을 모색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그 결과, 청소년 범죄자의 재범률이 줄어드는 효과가 관찰되었고, 특히 가해자가 자신의 행동이 끼친 피해를 이해하고 스스로 변화할 동기를 얻는 긍정적 사례가 늘었다​. 핀란드 역시 학교 폭력 문제에 회복적 정의를 활용하여, 교사·또래조정자가 중재해 가해 학생의 진심 어린 사과와 피해 학생의 용서를 이끌어내는 학교 협의회 모델을 적용하고 있다​. 핀란드는 경미한 청소년 비행의 경우 교육 프로그램이나 지역 봉사로 대체하여 처벌보다 교화에 방점을 찍고 있으며, 엄중한 사건에 한해서만 소규모 청소년 구금센터에 위탁하는 등 자유 박탈을 최후의 수단으로 둔다​.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등도 청소년 범죄에 대해 공식 처벌 이전에 피해자와의 대화, 공동체 봉사, 심리상담 등을 조건으로 사건을 종결하는 회복적 사법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이러한 회복적 접근은 청소년을 범죄자 낙인 대신 변화 가능한 청년으로 보며,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는 법을 가르치면서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설 수 있게 돕는 것을 목표로 한다.

 

핀란드·유럽 – 청소년 참여형 정책설계

핀란드는 청소년을 정책 결정의 주변인이 아닌 당사자로 인정하는 철학이 뿌리깊다. 2017년 개정된 핀란드 청소년법은 국가와 지방자치단체에 청소년의 사회적 포함과 영향력 행사를 촉진할 의무를 부여하고, 모든 시·군에 청소년위원회(Youth Council)를 설치하도록 규정한다​. 이를 통해 지역의 복지, 교육, 여가 정책 수립 시 청소년들이 공식 의견을 제시하고 토론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중앙정부 차원에서도 청소년 원탁회의를 정례화해 청소년들이 원하는 지원과 제도를 직접 제안받는다

독일은 연방 차원에서 청소년의회(Jugendparlament)를 운영하거나 청소년 대표를 시 의회에 참관시키는 등 다양한 참여 기회를 제공한다. 일본 역시 2009년 「청소년육성법」 개정을 통해 청소년 정책에 대한 관민 협의기구를 설치하고, 청소년 단체와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하는 절차를 강화했다. 이러한 참여형 정책설계는 청소년 정책의 실효성을 높일 뿐 아니라, 청소년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전환하는 효과도 가져온다. 청소년들이 직접 정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기성세대는 청소년을 동등한 시민으로 존중하게 되고, 청소년들 스스로도 사회 문제 해결의 주체로 성장하게 된다.

 

프랑스·캐나다 24시간 통합 서비스 모델

위기청소년 지원에서 접근성 연속성을 높이기 위한 혁신으로, 일부 국가는 원스톱(one-stop) 통합지원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프랑스의 메종 데 아도레상(Maison des Adolescents, 청소년의 집)’ 모델이 대표적이다. 1999년 첫 센터 개설 이후 현재 100곳이 넘는 청소년 통합지원센터(MDA)가 전국에 설립되어, 의료·심리 상담, 사회복지 서비스, 법률 자문, 취미 활동까지 한 곳에서 제공한다​. 이들 센터는 병원이 아닌 커뮤니티 공간에 위치해 청소년들이 문턱 낮게 찾아올 수 있고, 평일 저녁 늦게까지 운영되며 일부 긴급지원은 24시간 연계된다. 프랑스 MDA의 핵심은 청소년을 질병이나 문제 위주로 보지 않고 11~21세 청소년기 전반의 복지 증진을 목표로 한다는 점이다​. , 문제 발생 후 개입이 아니라 생활 전반의 어려움을 예방하고 조기에 도와주는 것이다. 한편 캐나다의 Foundry 센터나 호주의 Headspace 센터도 비슷한 통합서비스 모델로, 청소년 정신건강, 취업, 주거 지원을 통합 제공하며 예약 없이 즉각적인 상담이 가능하도록 했다. 일본도 각 도도부현에 청소년 종합상담센터를 두고 가출·비행 청소년을 24시간 일시 보호 후 연계하는 시스템을 운영하며, 최근 늘어나는 은둔형 외톨이 청년을 지원하기 위해 지방자치단체별 전담센터를 설치하고 있다​. 이러한 24시간 통합서비스들은 문을 두드리면 언제든 누군가 있다는 신뢰를 청소년에게 심어준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위기 상황이 심야나 주말이라고 해서 도움의 손이 닿지 않으면 청소년은 다시 범죄나 착취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시 가동되는 안전망은 새로운 패러다임의 필수 요소라 할 수 있다.

 
철학과 실행의 비교: 한국과 해외의 시사점

 앞서 살펴본 한국의 새로운 시도들과 해외 사례들을 종합해보면, 정책 철학과 실행 구조 면에서 몇 가지 뚜렷한 차이점이 드러난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위기청소년을 그저 보호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가, 아니면 회복과 자립의 능동적 주체로 보는가?”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정책 패러다임의 방향을 결정짓는다.

 

철학의 측면에서, 해외 사례들은 공통적으로 청소년을 존엄한 권리의 주체로 바라본다. 미국의 트라우마 인식 접근은 비행 청소년을 망가진 아이로 낙인찍기보다 치유가 필요한 아이로 보고, 그 내면의 상처를 어루만진다. 영국·핀란드의 회복적 정의는 잘못을 저지른 청소년도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지는 동시에 용서와 화해를 경험할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 프랑스의 통합지원센터는 도움을 청하는 청소년에게 의무와 통제보다 신뢰와 공감을 앞세운다. 반면 한국은 아직까지도 위기청소년을 문제를 일으키는 대상혹은 보호해야 할 미성숙한 존재"로 보는 시각이 강하다. 보호시설의 규율 위주 생활이나 처벌 위주의 선도 프로그램 등은 이러한 인식의 반영이다. 다행히 최근 청소년을 권리의 주체로 보는 담론이 활발해지고 있지만, 사회 전반의 인식 변화는 이제 시작 단계다. 이를 전환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제도 혁신도 현장에서 온전히 구현되기 어렵다.

 

실행 구조의 측면에서는, 해외의 혁신 사례들은 대부분 다부처·다기관 협업 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청소년 문제는 복합적이기에 교육·보건·복지·사법 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야 함을 일찍 깨달은 것이다. 프랑스 MDA의 경우 병원, 학교, 경찰, 지방정부가 하나의 네트워크로 움직이고, 미국의 청소년 치유 프로그램은 가정법원 판사, 보호관찰관, 심리치료사가 팀을 이뤄 개입한다. 반면 한국은 부처마다 개별 사업이 있고, 학교전담경찰관제, 상담복지센터, 쉼터, 소년분류심사원 등이 분절적으로 운영되어왔다. 최근 통합지원체계 개편 움직임이 있지만 여전히 협력의 제도화는 갈 길이 멀다. 이에 따라 서비스 지속성과 연속성에서도 차이가 난다. 예를 들어 독일 Jugendamt(청소년국)는 아이가 태어날 때부터 성년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필요시 개입하고 지원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위기청소년이 쉼터에서 지낼 땐 보호를 받다가, 쉼터를 나오면 지원이 끊겨버리는 단절이 생긴다. 지속가능성 측면에서도 해외는 법적 기반과 안정적 예산으로 오래된 프로그램이 정착된 반면, 우리는 시범사업이나 한시적 프로젝트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앞서 언급한 청소년안전망팀도 지속적인 국가 예산 지원 없이 지자체 재량에 맡겨두다 보니 넓게 퍼지지 못했다​.

 

청소년 인식 변화 유도 여부도 중요한 비교 지표다. 해외의 회복적 정의나 참여형 정책은 청소년들 스스로의 인식 변화를 유발한다. 가해 청소년이 피해자와 마주앉아 대화할 때, 그 역시 책임 있는 사회 구성원으로 대우받는 경험을 한다. 이는 나는 믿을 만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자기인식을 심어준다. 참여 예산이나 청소년위원회 활동을 통해 내 의견이 사회를 바꿀 수 있다는 성취를 느끼기도 한다. 이렇듯 정책이 청소년의 내적 변화까지 일으키는가가 성공 관건이다. 한국에서도 일부 자립 지원 프로그램에 참여한 청소년이 처음으로 어른들이 나를 필요한 존재로 대해줬다고 고백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보면 아직 많은 위기청소년이 자신을 낙인찍힌 존재로 여기고, 사회에 불신과 반감을 품은 채 성장하고 있다. 정책이 이들의 마음까지 어루만지지 못한다면 실효성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결국 한국과 해외 사례의 차이는 한마디로 패러다임의 거리라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이제 그 거리를 좁혀야 한다. 다행스럽게도 국내에서도 트라우마 예방, 회복적 생활교육, 청소년 참여 권리 신장 등 새로운 철학이 조금씩 싹트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를 일관된 국가 전략으로 밀고 나가면서, 동시에 지역사회 구석구석까지 스며들도록 실행 구조를 갖추는 일이다. 법과 제도, 예산과 인력, 교육과 홍보 모든 면에서 종합적인 변화가 요구된다. 위기청소년을 회복과 자립의 주체로 보는 철학이 중심에 자리할 때, 비로소 파편화된 노력들이 하나의 방향으로 모일 수 있을 것이다.

 

맺음말: 통합·참여·회복·자립을 향한 패러다임 전환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위기청소년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은 네 가지 핵심 가치: 통합, 참여, 회복, 자립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교육·복지·사법이 연계된 통합적 지원체계를 구축하여 어느 문을 두드려도 필요한 도움이 연결되는 사회안전망을 만들어야 한다. 둘째, 청소년 당사자의 참여와 권리를 보장하여 정책 설계부터 실행, 평가까지 청소년의 목소리가 반영되도록 해야 한다. 셋째, 처벌과 통제가 아닌 회복적 접근을 통해 위기청소년이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상처를 치유하며 건강한 사회구성원으로 돌아오도록 도와야 한다. 넷째, 단기 보호를 넘어 지속적인 자립 지원으로 학업 복귀, 직업 훈련, 주거 안정까지 이르는 성장 경로(Growth Pathway)”를 마련해야 한다. 이 네 가지가 유기적으로 맞물릴 때 비로소 새로운 패러다임은 현실에서 작동할 것이다.

 

이를 위해 수행 주체별로 구체적 역할을 제언하고자 한다. 정부는 무엇보다 부처 간 협력을 제도화하고 예산을 통합적으로 투입해야 한다. 청소년 관련 법령을 정비해 위기청소년 지원에 관한 기본법제정도 검토할 만하다. 아울러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책임을 분담해 모든 지역에 청소년안전망 전담인력을 확충하고, 성공적인 시범사업은 법정 사업으로 승격시켜 지속성을 담보해야 한다. 교육기관은 처벌 위주의 학생지도에서 벗어나 회복적 생활교육, 또래 상담, 위기징후 조기발견 시스템 등을 도입함으로써 학교가 예방의 최전선이 되도록 해야 한다. 교사 연수에 트라우마 대응 기법과 상담 역량 강화를 포함시키는 것도 필요하다. 복지 현장에서는 청소년 상담사, 사회복지사들이 전문성을 업그레이드해 트라우마 치유 코디네이터, 자립지원 코치 등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한 명의 사례관리자가 끝까지 청소년 곁을 지키며 관계를 맺는 종단 케어가 이상적 모델이다. 시민사회와 기업 역시 위기청소년을 공동체 구성원으로 포용하는 노력이 요구된다. 지역 주민이 멘토로 참여하는 멘토-멘티 결연, 기업이 나서서 제공하는 직업체험 인턴십, 지역 모금으로 조성하는 자립지원 기금 등 민간의 창의적 자원이 더해질 때 공공의 지원은 배가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다. 더 이상 위기청소년을 향해 손가락질하거나 연민의 시선으로만 바라보지 말아야 한다. 앞서 청소년주거권 네트워크가 지적했듯이, 폭력이 지속되는 집이나 낡은 시설에만 청소년을 가두어두는 것은 청소년을 단지 보호의 대상으로만 바라보기 때문이며 통제를 위한 보호는 진정한 보호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그 문장을 사회 전체가 곱씹어봐야 한다. 위기청소년 한 명 한 명이 사회가 함께 책임져야 할 우리들의 아이이자, 동시에 스스로 삶을 개척해나갈 주인공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들이 좌절을 딛고 일어서도록 손을 내미는 것은 어른들의 의무인 동시에, 우리 공동체의 미래에 대한 투자이기도 하다​.

 

끝으로 강조한다. 패러다임을 바꾸지 않으면, 우리는 같은 문제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위기청소년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건만, 여전히 해결되지 않고 되풀이되는 까닭은 우리가 근본적인 접근법을 바꾸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는 과거의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틀을 짜야 할 때다. 통합·참여·회복·자립의 가치로 무장한 새로운 패러다임만이 위기청소년들에게 희망의 다리를 놓아줄 수 있다. 정부부터 학부모, 현장 실무자, 지역사회까지 모두가 한 마음으로 그 변화를 실천해 나갈 때, 비로소 우리의 청소년들은 위기에서 희망으로, 보호 대상에서 자립하는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패러다임의 전환,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시대적 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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